처녀와 바다
― 수평선 저 너머에 묻혀버린 h에게

                                                 김 동 원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 작가 노트

▲ 김동원 시인

첫사랑은 이승에 없는 꽃밭이다. 무의식의 기억에서 의식의 꽃망울은 터진다. 바다의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탁 트인 동해는 나의 놀이터였다. 소녀와 조개를 주워 그림을 그리면 밀물이 이내 지워버렸다. 나의 소년기의 해와 달은 첫사랑 소녀를 중심으로 돌았다. 초여름부터 늦여름까지 나는 발가숭이로 온통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어쩌다 소낙비가 바다 물위로 달아나면, 하늘의 아름다운 작은 물기둥들이 악기 소리를 냈다. 엄마와 소녀의 손을 잡고 본 수천만 개의 눈꽃 송이들이 바다로 떨어져 녹아내리던, 그 겨울 폭설은 잊히지 않는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나는 사랑의 불을 알았다. 처음 안아 본 그 앳된 소녀를 나는, 밤마다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쳐다보았다. 꿈 속 분홍 분꽃이 다 떨어졌을 땐, 내 심장은 해와 함께 바다 물속에 녹아버렸다. 그랬다. 바다는 나에게 언제나 죽음과 사랑의 부활 공간이었다. 청년이 되어갈 무렵, 그 소녀의 바다는 이따금 수천 만 개의 해당화가 피어 꽃밭이 되어 있었다. 두 번 다시 피지 않을 그 꽃에 대해, 나는 한 번도 하늘에 되묻지 않았다. 훗날 시인이 되었을 때, 내 심장에 엉킨 피를「처녀와 바다」란 시 속에서, 그 소녀를 영원히 묻었다.
김동원은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1994년『문학세계』로 등단. 시집『구멍』,『깍지』외 다수. 평론집『시에 미치다』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태양셰프」당선. 현재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협시분과위원장, 한국시인협회원.『텃밭시인학교』시창작 교실 운영.

* 부울경뉴스『오늘의 자작추천시』는 부산 ․ 울산 ․ 경남 ․ 대구 ․ 경북에서 활동하는 중견시인들의 자작추천시를 시인이 직접 쓴 작가노트와 함께 소개하는 지면입니다.